우연히 만난 초등 4학년의 어린 학생이 나의 고민의 시작이었다.
이 어린 학생은 원어민과 몇 년간 친구들과 그룹으로 수업해 왔다고 했다.
어떤 커리큘럼도 갖고 있지 못한 채 서점에서 이 책, 저 책을 뒤적거려보고
중학교 과정의 Junior Reading Tutor 읽히고 듣게 했다.
수업은 문법 중심이 되었다. 아무튼 학생은 성실하게 잘 따라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제시한 책이 학생의 인지력과 어휘력에 맞는 것인지,
나의 수업이 이즈음의 학생에게 옳은 것인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초등학생과 중등 1.2학년에게 더 좋은 수업방식이 있을 것 같았다.
`재밌는 책을 같이 읽고 그 책의 내용으로 수업한다면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고
몇몇 지인들에게 책을 추천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아뿔싸! 그래서 그 학생과 내가 처음 접한 원서가 HOLES였다니!
어려웠다. 뭔가 도움이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인터넷을 뒤적여 몇 군데 전화상담을 했고,
ERC를 선택한 것은 지금은 탁월한 선택이었던 것 같지만,
어떤 사전 정보도 없던 당시 나의 선택의 이유란 것은
단지 짧은 전화 통화로 ‘친절하고 정확하고 목소리가 좋아서,’라는 게 전부였다.
방문의 처음은 주말이라 직원들이 없었던 사무실 분위기는 낯설고 서먹했다.
그러나 이후, 선생님의 조심스럽고 열띤 강의에 나도 모르게 몰입하게 되었다.
강의는 시작부터 나의 무지함을 일깨우는 것이었다.
소홀히 여겼던 책의 표지에서 학생으로부터
충분한 호기심을 유도해 낼 수 있다는, 지금은 이처럼
당연한 것이 당시엔 뭉클하게 와 닿았다.
음소. 음절 수업은 이 짧은 시간에 ‘대체 왜 이것까지?’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강의가 횟수를 더해감에 따라
스스로 체계적이고 논리적으로 정리되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도, Phonics, Fluency의 수업까지도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수업이라 생각하며 참석했었다.
그저 독서지도가 궁금했고 철자를 가르쳐야 하는 정도의 어린 학생은
내가 만날 수 있는 학생이 아니리라 여겼던 까닭이다.
그런 생각의 기저에는 아마도 그들에 대한 커리큘럼을 생각하기는커녕
그들에 대한 얕은 지식조차 없어서였을 거라는 뒤늦은 깨달음도 있다.
수업을 들으면서, 이 수업을 통해 배운 것을 적용한다면 영어를 처음 접하는
6, 7세의 어린 학생들에게도 교수안을 만들어 내는 것은 이제는 어렵지 않을 것 같다.
그것을 뒷받침할 만큼의 충분한 교재와 보충 자료들도 이곳에 잘 갖춰져 있는 듯 보였다.
다만, 아직도 나로서는 그 어린 학생들과 rapport를 형성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놀랍게도 나 자신의 변화를 스스로 느끼고 있다.
열정적인 선생님과 열정적으로 함께한 학생들 모두에게 감탄하는 동안,
조금쯤 그들을 닮아가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
모두가 나를 채근하는 무언의 힘이었다.
물론, 열심히 도움이 되고자 하시던 직원들의 모습도 감동적이었다.
감사한 시간이었고 우연이라 해도 이 교육을 선택한 자신을 스스로 기특해하고 있다.
얼마 전 우연히 TV에서 들었던 어느 패널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팔면 팔수록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곳에 적합한 생각이 아닐까?